안녕하세요! 환입니다!
오늘은 영화 <조커> 2탄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커를 리뷰 해보려고 합니다.
그럼 오늘의 영화 리뷰 시작합니다!
(영화 리뷰 이기때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별점 ★★★★
영화 <조커> 기본 정보
OTT: NETFLIX
개봉: 2019. 10. 02.
장르: 스릴러, 드라마, 범죄
감독: 토드 필립스
출연: 호아킨 피닉스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3분
줄거리와 심층분석
저는 3가지 정도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심리적인 관점
2. 사회적인 관점
3. 예술성의 관점
(관점별로 해석되는 내용이 많아서 총 3개의 게시물로 나눠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사회적인 관점
이 시각에서 보게 되면 조커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말하자면, 쓰레기로 비유가 되고 있습니다. 초반에 보게 되면 어 아서가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한 다음에 이 쓰레기를 발로 차면서 막 화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도 넘어져서 그 쓰레기들 사이에서 망연자실해서 앉아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 그대로 쓰레기들 사이에 아서가 쓰레기가 되어있는 모습이고 사회적인 능력이 박탈된 상황에서 일종의 노동 현장에서의 쓰레기처럼 영화에서 위치매김된다는 면에서 사실은 영화에서 이 쓰레기에 관한 초반의 뉴스는 아서의 상황을 그대로 코멘트하는 부분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이렇게 지독하게도 쓰레기에 비유될 뿐만 아니라 사실은 아서가 극중해서 보여주는 몇 가지 행동들도 이와 관련해서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인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면 중간에 굉장히 스스로가 인제 박탈감이나 힘든 그런 상황 속에 놓여서 냉장고 안에 모든 음식을 꺼내게 되고 그 냉장고 속에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 그런 아서의 기이한 행동을 보여주는 굉장히 짤막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냉장고 안에 음식을 끄집어내고 아서가 들어가는 행위 자체는 그 자체로 굉장히 기이한 행동이지만 다시 한편, 그가 냉장고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꺼내고 냉장고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본인이 상할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죠. 냉장고에 들어가서 냉장고 속에 웅크리고 있다라는 것은 본인이 상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냉장고가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이렇게 본다면 냉장고 속에 들어가 있는 그의 모습은 사실상 망상에 사로잡혀서 거짓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런 아서의 상황에 대한 시각적인 은유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죠.
더군다나 아서가 극중에서 망해 가는 뮤직샵의 물건들을 팔기 위해서 떨이 세일을 하는 그런 간판을 돌리면서 행인들에게 홍보하는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초반에 펼쳐지게 되는데요. 그 끝에서 아이들이 그 간판을 뺏어서 부수고 그리고 또 아서를 공격해서 때리는 그런 장면 때문에 그 아르바이트는 성공하지 못하죠. 어찌 됐건 그 아르바이트에서 그가 홍보하려고 했던 것은 한 가게가 망해서 싸게 판다라는 것을 홍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쓰레기로 지칭되는 것은 바로 이 주인공이 시각적으로 아서가 그 자리에 위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뮤직샵이 폐업을 한다든지 상하는 음식들에 비유가 된다던지 폭도들에 대한 언론에서의 질타랑 사실은 관련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아서 플랙이라는 1명의 조커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서 플랙으로 촉발된 수많은 조커들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아서는 사실은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거를 둘러싼 모든 환경 속으로부터 이렇게 학대를 받고 제대로 배려받지 못했던 사람이기 때문인 것인데요. 예를 들어서 집안에서는 양부가 그를 어린 시절에 수시로 때렸습니다. 때리기도 하고 라디에이터 같은 데서 지지기도 하고 그런 것 때문에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사실상 이 머릿속에서 어떤 이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울 수가 없고 어떤 상황이 되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그런 끔찍한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던 것인데요. 그 모든 상황에서 자기를 지켜줘야 될 어머니는 또 그 모든 상황을 방관함으로 인해서 아동 학대의 공범이 되는 그런 역할까지 하게 되었죠. 집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질병의 결과로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을 이해해 주는 어른은 영화 속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버스 안에서 어떤 아이를 향해서 이렇게 웃기려고 했을 때 어머니였던 또 다른 승객이 보여주는 굉장히 싸늘한 태도라든지 혹은 집에 돌아와서 굉장히 끔찍한 마음에 혼자서 이렇게 웃음 속에서 조절하지 못해서 마구 웃게 될 때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공동체라든지 혹은 이웃으로부터도 그런 따뜻한 배려를 전혀 받지 못하죠. 정부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면 시의 어떤 복지 예산을 가지고 이런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상담도 하고 약도 먹어야 되는 상황인데 시에서는 그런 예산을 대폭 줄이게 되죠. 그래서 병원조차 제대로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겹쳐져서 집안으로부터나 극 중에 어떤 그런 커뮤니티로부터나 아니면 정부나 사회로부터 그는 제대로 된 배려를 받지 못하죠. 그리고 최소한의 배려를 받지 못해서 그는 점점 더 악화가 되는 상황이 초반에 집중적으로 펼쳐지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아서은 끊임없이 자기비하에 시달립니다. 영화에서 이런 자기 비하와 굉장히 낮은 자존감은 자살 충동으로 영화에서 묘사가 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손가락 모양으로 어 자기 권총 모양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겨냥하면서 죽음 충동을 표현하는 것 같은 장면들이 초반에 집중적으로 묘사가 되죠.
초반이 지나서 인제 총을 실제로 입수하게 되면 실제로 총을 자기의 머리에 겨누는 장면까지 영화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이 인물은 자기가 견딜 수가 없는 수많은 불행과 고통이 있을 때 이 고통을 멸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라는 자기 비하적인 그런 생각을 갖고 했었던 그런 강박에 사로잡혔던 인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인물이 자기 자신으로 향한 자기 파괴적인 공격성을 바깥으로 전환하는 사건 영화에서 생기게 되죠. 그것이 바로 지하철에서 세 사람을 죽였다. 첫 번째 범죄를 저지를 때 일도 발화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 지하철에서 굉장히 부유한 영화에서 나중에 뉴스에 나오는 걸 보면 3명은 금융인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그 3명의 금융인이 지하철을 타서 오로지 굉장히 힘이 약한 타인에 대해서 장난스럽게 굴고 못되게 굴므로 인해서 어떤 쾌감을 얻기 위해 조커를 괴롭히기 시작하죠. 그 상황에서 참지 못하고 조커는 결국 품에 있던 총을 이용해서 세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이런 우발적인 살인사건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이 나의 모든 불행의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야라는 인식으로부터 정반대로 뒤집어서 어 자기에게 불행을 강요하기도 하고 어 이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던 그 사람들을 향해서 복수를 펼쳐 펼치게 됩니다. 이 전환기적인 사건을 맞았을 때 지하철에서 죽였던 사람은 조커가 3명을 죽였습니다. 이후에 3명을 더 죽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본다면 이 3명을 죽였던 지하철의 사건은 뒤에 3명을 죽인 사건의 어떤 밑그림 같은 그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앞에 지하철에서 3명을 죽였을 때는 분명히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죽인 거지만 세 사람을 죽인 것은 애초부터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발적으로 이 마음속에서 분노가 터져 나와서 세사람을 죽이게 된 건데 그렇게 세사람을 일단 죽이고 나니까 다시 말하면 자기를 향한 공격성을 바깥으로 세상으로 사회를 향해서 바꾸고 나는 어떤 그런 순간이 되니까.
또 다른 3명을 자기 삶에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들이 연달아서 펼쳐지게 되죠.
그 세 사람은 바로 자기 어머니였고요. 혹은 직장에서 자기를 괴롭히거나 함부로 굴거나 총을 주면서 굉장히 이상한 쪽으로 몰아붙였던 랜들이라는 어떤 동료가 있었고요. 마지막으로는 머레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3명과 지하철에서 새벽 조커가 죽이게 되는 모두 그 6명의 피살자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조커의 내면으로만 국한해서 본다면 그의 삶에서 그에게 굉장히 해악을 끼쳤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형태로 이 6번의 살인이 이루어지게 된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 연속적인 일련의 살인의 끝에 가장 중요한 살인으로 영화 속에서 노사가 되고 있는 클라이맥스의 사건은 바로 머레이를 죽이는 사건입니다. 머레이를 죽일 때 왜 머레이를 죽여야 했을까? 라는 것을 만약에 사회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머레이가 예의가 없었고 배려가 없었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데 영화 속에서 바로 이 주인공이 나와서가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달라라고 요구하는 상대방이 1명이 더 있었죠.
그것은 바로 토마스 웨인입니다. 화장실에서 자기의 아버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토마스 외인을 만나서 당신네 아버지 아니냐라고 따져 물을 때 상대방이 함부로 행동을 하게 되자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니니까요? 토마스 입장에서는 그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달라라고 말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는데 그러니까 극 중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그에게 갖추지 않고 그를 몰아붙인 것으로 극 중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2명의 사람은 바로 상징적인 2명의 아버지 토마스 그리고 머레이라고 두 사람은 역시 일치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겠죠. 그런 측면에서 머레이를 죽인다는 것은 지금 내 앞에서 유달리 예의가 없고 유달리 나의 불행이나 이런 거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죽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한 번도 배려라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는 사회 전체에 대한 그의 일종의 어떤 폭동이나 그의 복수심이 발현되는 형태로서 살인이라는 행동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이 영화 속에서 아사가 펼치는 그 모든 행동은 끔찍한 범죄이기도 하고 당연히 엄청난 악이 있죠. 그런데 이런 악을 배태하고 양육하게 되는 말하자면,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악의 영양분을 제공하는 수원지는 무엇인가라고 하면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 그리고 배려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사회다라는 그런 어떤 이야기들을 약자에 대해서 배려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 속에 밀어 넣는 그런 사회 시스템과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어떤 통렬한 비판 같은 것이 이 악에 관한 끔찍한 연대기의 뒷면에 담겨있는 그런 밑그림이 아닐까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