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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조커> 심층 리뷰 (예술성의 관점)

by 환(幻) 2024. 10. 21.

안녕하세요! 환입니다!
 
오늘은 영화 <조커> 3탄 예술성의 관점에서 조커를 리뷰 해보려고 합니다.

 
그럼 오늘의 영화 리뷰 시작합니다!
(영화 리뷰 이기때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조커> 기본 정보


OTT:  NETFLIX
개봉: 2019. 10. 02.
장르: 스릴러, 드라마, 범죄
감독: 토드 필립스
출연: 호아킨 피닉스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3분

 

줄거리와 심층분석

저는 3가지 정도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심리적인 관점
 
2. 사회적인 관점
 
3. 예술성의 관점
 
(관점별로 해석되는 내용이 많아서 총 3개의 게시물로 나눠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술성의 관점

영화의 제목은 조커입니다. 조커는 물론 인제 가장 유명한 빌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조커라는 이름을 풀면 농담하는 사람 조킹하는 사람이란 뜻이겠죠. 조커 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조커는 무엇보다도 농담을 하는 것이 직업인 예술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굉장히 흥미롭게 달리 보일 수도 있다라는 것이 제 생각인데요. 이 영화에서 이 농담을 하는 예술가인 아서 플렉은 자기 직업이 농담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농담을 하는 데 대한 커다란 재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자기는 남을 웃기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극 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조커를 보면서 당신이 하는 농담 하나도 안 웃기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나는 이제 코미디언이 되겠다라는 말을 아서가 엄마한테 할 때 엄마가 뭐라고 하냐면 아니 코미디언을 웃겨야 되는데 네가 어떻게 그것을 하니 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웃기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죠. 

중반에 보면 브루스 웨인의 집을 찾아가서 어린 브루스 웨인한테 이 대문 너머로 마술쇼를 하면서 웃길려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괴한이 나타나게 되니까. 그것을 제지하면서 알프레드 집사가 오죠 알프레드 집사가 오니까 나는 그냥 아이를 웃겨주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을 하니까 알프레드 집사가 뭐라고 얘기하냐면 하나도 안 웃겨 라고 이야기를 하죠. 웃기지 않는다는 사람인 것인데요. 그것 외에도 회사에서 결국은 해고가 되었을 때 해고의 이유에 대해서 아서 플렉 자체가 자신을 찾아온 경찰한테 뭐라고 얘기하냐면 웃기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나를 해고했다 라고 설명하죠. 그리고 그 설명 직후에 경찰로부터 몸을 돌려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자동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거기에 부딪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람이 다가가면 사람을 자동적으로 센서가 인지를 해서 문이 열리게 되는 게 자동문의 어떤 그런 원리일 텐데 센서조차도 그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인데요. 그런 존재감이 없는 것은 자연인으로서도 그렇지만 바로 이 농담을 하는 예술가로서도 그가 얼마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인지를 사실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장면인 것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와서는 공연에 해당하는 장면들마다 번번이 공연해서 실패합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 망해가는 뮤직샵을 홍보하는 그런 공연을 거리에서 사실상 펼친다고 볼 수 있죠. 그것 자체가 광고이기도 하고 공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근데 그 공연은 아시는 것처럼 다른 아이들이 습격을 해서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어떤 굉장히 귀여운 소년에게 공연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걸 웃기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실제로 아이는 웃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싸늘하게 제지하는 상황이 돼서 공연은 결국 실패하게 되죠. 브루스웨인을 찾아가는 공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루스 웨인 앞에서 마술쇼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알프레드가 와서 공연을 제지하게 돼서 결국 공연은 중단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동병원을 찾아가서 이 광대 복장으로 역시 아이들을 웃기려고 했을 때도 의도치 않게 갖고 있던 총이 떨어지는 바람에 역시 공연에 실패하게 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클럽 무대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웃기려고 할 때 자기가 먼저 웃고 웃기지 않은 농담을 하기 때문에 역시 사람들을 웃기는 것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실패하고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이다라는 컨셉으로 머레이쇼에 출연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극 중의 전반부에서 등장하는 그가 했던 모든 공연들은 하나같이 다 남을 웃기는 데 실패하고 또 공연이 제대로 이루어지는데 실패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실패한 예술가다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던 그가 중반부에 들어서게 되면 마침내 공연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가 최초로 성공한 공연 다시 말하면 변곡점에 실패한 예술가로부터 성공한 예술가로 가는 변곡점이 있는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살인 공연입니다.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건인 것인데요. 그 장면을 보면 대본적으로나 아니면 연출가로서 연출했던 포인트 같은 것을 보면 일부러 공연처럼 만들었던 부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원래 처음에는 양복을 입은 세 남자가 퇴근길에 한 여성을 괴롭히기 위해서 굉장히 이제 나쁜 말들을 하기 시작할 때 한쪽 구석에 있는 아서을 보게 되죠. 아서는 거기다 광대 복장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던 상황인데요. 그러니까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그 세 남자가 놀리거나 괴롭히기 위해서 아서 쪽으로 다가옵니다. 근데 그냥 걸어와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뮤지컬 노래를 흉내 내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다가오죠 

광대를 불러다 줘라는 노래를 하면서 그것이 괴롭히는 어떤 주축이 되는 주범에 해당하는 놈이 마치 어떤 폴 폴댄스라는 것처럼 지하철에 있는 손잡이들을 잡으면서 춤추듯이 노래하듯이 그에게 다가와서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그 지하철을 무대라고 생각한다면, 이 3명의 선행된 공연자가 주공연자인 광대를 광대를 불러다 줘 라고 노래를 하고 있고 그 상황에 맞춰서 광대가 짠하고 무대에 등장하는 그런 공연 장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됐을 때 결과적으론 분노를 참지 못했던 이 광대 복장을 하고 있었던 다시 말하면 무대 복장이 될 텐데요. 아사 플렉이 그들에게 총을 쏘아서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총을 쏠 때 그는 노래를 부르듯이 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하는 듯이 하는 방식으로 역시 세 사람을 죽이게 되죠. 

그렇게 본다면 이 최초로 그가 버리게 된 세사람을 죽이게 되었던 끔찍한 살인사건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공연이다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 이전에 그가 시도했던 모든 공연들은 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했던 살인 공연은 성공합니다. 그럼 이 공연은 이전과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까? 공연자로서 볼 때 그는 항상 자기를 비하하는 공연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농담의 소재로 자기의 삶을 잡았고 그 삶 속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자기 자신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죠 예술의 소재로 삼았던 것인데 근데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존재감을 없애는 방식으로 했던 공연을 정반대로 상대방에게로 바꾸어서 상대에게 가학적인 공격을 하고 그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어 그런 공연으로 전환하는 순간 그래서 공연은 대성공을 하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이 성공의 공연의 기쁨을 맛본 이 예술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3번의 살인의 공연을 더 펼쳐지게 되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서 그 다음에 바로 죽이게 되는 의도적으로 죽이는 첫 번째 살인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죽일 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게 되죠. 아니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단 1분도 없었던 것 같아 근데 내 삶을 가만 보니까 여태까지는 내 삶이 굉장히 비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희극이었어 라는 말을 하고 나서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펼쳐집니다. 비극과 희극이라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비극이라는 것은 대상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킬 때 거기서 나오게 되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인 장면을 찍을 때는 클로즈업으로 찍기 마련인데요. 반면에 희극이라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마음껏 보고 웃으려면 양자 사이에서의 거리감이 확보가 되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희극을 찍을 때 코미디 장면을 찍을 때는 상대적으로 멀리 카메라를 두고 찍는 그런 부분들이 있을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은 애초에 자기 삶과 지나치게 밀집이 되어 있어서 삶 자체가 너무 불행하기 때문에 제대로 남을 웃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기본의 어떤 그 예술의 재료가 되는 삶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인 것이죠. 그렇지만 자신의 삶을 멀리 떨어져서 보기 시작하고 사실상 자기가 엄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친엄마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모든 망상에서 깨어나는 건 자기 삶이 너무나 의미가 없고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보여서 희극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삶을 희극으로 멀리 떼놓고 보는 순간 그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극 중에서 성공한 예술가가 된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렌들를 죽이게 되고 그리고 나서 머레이까지 죽이게 되죠. 마지막 의도적으로 죽였던 3명의 사람뿐만 아니라 앞에 지하철의 세 사람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그가 죽였던 6명은 모두 다 일종의 예술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하철에서 죽였을 때 그 세사람은 공연의 형태로 춤과 노래를 하면서 자기한테 다가왔기 때문이죠.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망상에 빠져있는데, 토마스 웨인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를 낳았던 여성으로 자기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떻게 본다면 잘못된 대본에 따라서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머니를 살해하는 행위 자체를 예술가 영화로써 본다면 잘못되고 제대로 유능하게 연기하지 못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게 본다면 두 번째로, 죽이게 되는 랜더리라는 사람 자기의 동료 연기자는 굉장히 이기적인 예술가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는 머레이는 타락한 예술가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머레이 쇼에 등장할 때 완전히 조커로서 풀 분장을 하고 말하자면, 직업인 예술가로서 등장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쇼를 시작하면서 머레이가 그런 말을 합니다. 이제 당신 조커로서 등장했으니까 굉장히 멋진 조커를 해달라고 얘기하죠. 첫 번째 농담을 던지는데 그 농담이 무엇인가 하면 굉장히 기이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경찰이 갑자기 와서 한 남자의 집을 두드리더니, 이런 말을 했다는 거죠. 

당신의 아들이 음주운전 차에 치여서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전했다라는 농담을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는 이 나머지 패널들과 머레이는 깜짝 놀라면서 그게 무슨 농담이냐 라고 정색을 하면서 싫어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 그러면 또 다른 농담을 해주겠다고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또 다른 농담은 바로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3명을 지하철에서 죽인 범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라고 범행을 고백하는 농담이었습니다. 역시 그 얘기를 듣고 있는 머레이가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라고 공박을 하게 되고 그러자 분노하게 된 아서가 머레이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죠. 쏘아주기 전에 상대방에 대해서 머레이를 공박을 하게 되는데 어떤 논리로 공박하려면 왜 어떤 것이 웃기고 안 웃기는지에 대한 그 농담의 정의까지 당신이 규정하려고 드느냐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리고 상대를 살해하게 되는데 이 모든 행위는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송이 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살해행위 자체가 그대로 공연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 공연에 성공해서 사람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어떤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상황 속에서 상대가 규정하는 다시 말하면 주류 시스템과 이런 데서 규정하고 있는 농담은 이러저러해야 된다라는 틀을 그는 예술가로서 깬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자기가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밀어붙이게 되고 그 농담을 성공시키는 과정이 바로 머레이쇼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더군다나 첫 번째로, 했던 농담이 당신의 아들이 음주운전 차에 지어서 죽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인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아서이고요. 그 말을 듣고 있는 것은 머레이입니다. 근데 아서와 머레이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성립하냐면 일종의 유사 부자관계가 극중해서 계속 성립하고 있죠. 영화의 초반에 보게 되면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그런 사태에 대해서 뭔가 이런 시사적인 토크를 통해서 혼자 코미디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 쇼에 나서게 된 머레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한테 빌리라는 아들이 있는데, 빌리라는 아들이 이 모든 쓰레기를 못 치우는 사태에 대해서 듣더니,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 라는 거죠. 그 말은 뭔가 하면 아빠 그러면 쓰레기를 누가 이제부터는 갖고 와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인가 하면 쓰레기를 안 치워서 문제인 다시 말하면 사회에 있는 수많은 쓰레기라고 주류에 의해서 지칭되는 못되게 지칭되는 그런 사람들을 치워버려야 되고 없애버려야 되는 존재다 라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의 맥락일 것인데 엉뚱하게도 이 머레이 아들인 빌리라는 아이는 정반대로 쓰레기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다시 말하면 쓰레기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부로 말할 게 아니라고 보는 것이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쓰레기를 그러면 앞으로는 어디서 데리고 와라고 반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걸 인제 농담처럼 말을 하면서 이 머레이가 무슨 어떤 얘기를 하게 되냐면 빌리라는 애가 그렇게 내 아들이지만 똑똑하지는 않죠 라고 말을 하게 되는데 이럴 때 빌리는 정확하게 아서와 겹치는 존재됩니다. 

그러니까 진짜 아들인 빌리는 상상 속에 물론 이제 이때 상상이라는 건 아서의 상상이겠지만, 아서의 상상 속에서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두 사람 간의 어떤 유사 부자 관계를 사실은 코멘트한 그런 일종의 농담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음주운전차에 치여서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아서가 머레이야 라고 할 때 당신의 상상 속에 아들이 나서는 이미 죽었다라고 상상 속의 아버지인 머레이한테 통보를 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유사 부자 관계를 끊는 어떤 그런 일종의 단언이라고 볼 수 있겠죠. 더 이상 나는 망상 속에서 당신을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일종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내가 세 사람을 죽였다라는 것이고. 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자기는 훌륭한 공연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머레이를 살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머레이를 살해하는 것을 일종의 공연의 형태로 만듬으로 인해서 그가 처음에 얘기를 들었을 때 아니 세 사람을 죽인 것이 어떻게 농담이 될 수 있어라고 머레이는 공박을 하지만 머레이를 그런 머레이를 죽이는 것은 성공함으로 인해서 이전에 그가 농담이 아니었다고 말을 했던 지하철에서 세 사람을 죽였던 범죄 경험조차 농담으로 바꿔내는 데 성공한다고 볼 수 있죠. 결국 이렇게 해서 남을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이었던 아서는 남을 굉장히 자유자재로 웃길 수 있는 웃긴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텐데 그런 조커로 재탄생하게 되는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남을 웃기지 못하는 조커가 모든 사람을 웃게 만듭니다. 어떻게 웃게 만드느냐 가면을 쓰고 웃게 만들죠 그러니까 조커 가면은 기본적으로 웃는 모양이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가 공연을 통해서 이 모든 어떻게 생각하면 살인공연들을 성공시킴으로 인해서 유사한 맥락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게 되는 수많은 시위자들에게 조커 가면을 씌우게 되죠. 

그렇게 해서 그 조커 가면의 웃는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의 풍경들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지독한 농담 같은 것이죠. 모든 사람이 웃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끔찍한 상황의 어떤 소요 같은 것이 발생하게 되고 사회는 혼란 그 자체인 것을 영화가 보여주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예술가 영화로 보았을 때 웃기지 못했던 사람이 마침내 남들을 웃기는 자신만의 비법을 그대로 발휘해서 공연에 성공하게 되고 그 공연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을 다 웃게 만드는 것을 어떻게 보면 굉장히 역설적이고 또 지독한 풍자 속에서 보여주는 그런 클라이맥스다 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더군다나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농담하는 예술가인 사람이 조커일 테니까.라고 머레이가 공박을 했을 때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근거는 뉴스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뉴스의 이름으로 공연을 단죄하고 있는 것인데요. 거기에 대해서 그는 총으로 그를 상대방을 죽이는 공연을 통해서 다시 뉴스의 논리를 공연의 논리로 뒤집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디어에서 말하는 뉴스는 지독하게도 가진 자의 편인 것으로써 영화에서 표현이 되고 있는데, 그렇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뉴스의 논리를 예술의 논리로써 어떻게 보면 폭력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영화의 후반부라고 볼 수가 있겠죠. 사실은 이런 구도는 엄마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티비에서 나오는 뉴스가 다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고 그 특히 뉴스에서 나오게 되는 토마스 웨인이 하고 있는 얘기를 찰썩 같이 믿어서 이 도시의 구원자는 토마스 웨인이 될 거다라고 믿는 사람인데 그런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사실상 머레이를 살해하는 것과 유사한 그런 예술적인 맥락이 있다라고 본다는 거죠. 그런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뉴스의 논리를 아주 폭력적인 예술의 논리로 제압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은 엔딩이다.